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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교수의 철학 에세이]
불안의 시대와 삶의 열정
오늘 최선 다한 자부심 있어야 정체성 살리고 내면 위기 극복
작성 : 2008-10-30 오후 7:05:43 / 수정 :
전북일보(desk@jjan.kr)
“우리의 시대는 흥분된 시대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열의 시대는 아니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 그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진단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러한 시대진단은 오늘날에도 정신분석학자 페터 쿠터(Peter Kutter)에 의해 “우리의 세계는 정열이 없는 세계다”라는 거의 동일한 목소리로 반복되고 있다. 20세기 초반과 후반이라는 시간적인 차이나 역사적 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정열이 없는 시대, 즉 삶에 대한 뜨거운 실존의 감정이나 인간적 정서가 사회적으로 소통되지 않는 시대라고 본 것이다. 이는 무엇인지 모를 부산하고 흥분된 불안의 정조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추동시킬 그 어떤 정열도 결여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 소비문화는 끊임없는 자극과 새로운 흥분, 부산함과 소비를 야기하며 우리의 관심과 몰입을 요구한다. 연예인의 사생활이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인터넷의 댓글과 스포츠가 일상의 소일거리가 되는 시대, 새로운 전자제품이나 의상이 소비를 자극하며 삶의 흥분을 일으키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인지 모르는 자극을 끊임없이 받으며 동시에 이를 소모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적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즉 새로 나온 문명의 도구나 소식들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폐기하는 가운데 내가 살아있다는 정체성을 느끼며 동시에 우리는 삶의 열정이나 실존적 의미가 비어가는 것을 느낀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 인간과 인간의 소외라는 현대 문명의 위기 가운데 또 하나의 위기는 실존적 감정 없이 기계나 자동인형처럼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소비하며 사는 현대인의 내적 위기, 즉 삶의 의미의 위기인 것이다. 이는 타인과 인간적으로 교류하는 소통능력의 장애를 일으키며 자기 자신과 내면적으로 나누는 대화의 부재를 만들어 낸다. 내가 현재 여기에 살아있다는 실존적 자각은 다른 사람들이나 생명 있는 모든 것들과 생명의 정서적 감응을 일으키게 되는데, 물질세계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은 이러한 생명의 정서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다.
가속도가 붙어 속도를 느낄 새도 없이 진행되는 거대한 현대문명의 조류 속에서 공동화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불안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근원적 삶의 정열을 다시 살려내 삶의 실존적 의미지평을 열어야 할 것이다. 내가 여기 의미 있게 살아있다는 느낌이야말로, 내가 이 순간에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는 자기 확인이야말로, 내가 오늘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성실히 꾸려나가고 있다는 자부심이야말로 불안의 시대에 시대와 인간, 그리고 나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정현(원광대 철학과 교수)